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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년05월09일 04:37
나의 어머니…가정의 달에
 글쓴이 : 회 사무국
조회 : 160  

 나의 어머니…가정의 달에 

 

나는 태어나자 불과 3년만에 아버지를 여의였다. 타고난 팔자가 아주 험했던가. 아버지를 잃은 다음해, 겨우 만 네살 때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청상에 과부가 되시고 나는 아비 없는 자식이 된 것이다. 아버지는 병약하셨다. 필경 폐결핵이었을 것인데, 집안에서는 늑막렴으로 앓으셨다고 했다. 아마 전염성이 있는 폐병이란 말을 꺼내기가 민망했던 모양이다. 돌아가시기 훨씬 전에 벌써 피접이라는 명목으로 흑석동으로 성북동으로 격리된 요양을 하신 바도 있어서 나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다음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기억이 아직 또렷한데 어린아이들이 기억을 담는데는 세살과 네살이 그렇게 다른 것인

 

어머니는 15살에 두살 아래인 아버지와 혼인하셨다. 아버지의 집은 큰 부자였으나 어머니의 집은 영락한 양반가였다. 아버지는 서울에 사셨지만 어머니는 양평  무네미라는 곳에서 성장하셨다. 풍양 조씨 집안의 4남 2녀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큰언니와는 여러해 나이 차이가 있어 어머니가 출생했을 때는 이미 용인으로 출가한 뒤였다. 어머니 친정은 아주 완고하였다.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더 완고하셨다. 여자가 공부하면 팔자가 사나워진다고 공부를 엄격히 금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학구열이 강했다. 두살씩 터우리인 손아래 남동생이 한문 공부를 하면 할머니의 눈을 피해서 어깨너머 공부를 하셨다. 어머니는 이내 학교에 가지 못했지만 그때 어깨너머로 배운 한학이 아주 출중하셔서 훗날까지 시문을 유창하게 암송하곤 하셨다. 사서삼경을 읽으며 또 암송하시는 것이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책으로 고문진보가 있다. 그속에 있는 글을 줄줄이 외우는 것이었다. 제갈공명의 출사표를 암송하며 눈물을 보이시던 것이 어제와 같다.

 

우리 집은 전주 이씨 의안대군파이다. 먼 방계지만 이왕조의 종친이다. 왜 시골 샛님 집안인 어머니를 며느리로 삼으셨을까. 재미있는 것은 할머니는 안동 김씨, 작은 어머니는 여흥 민씨, 내 외가는 풍양 조씨, 이왕조 말에 외척을 축소하여 옮겨 놓은듯한 모양새다. 옛날에는 문벌을 많이 보았다. 다만 사대부냐 평민이냐 에 그친 것이 아니고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이없이 고루하지만 그 가문이 사색 당파 가운데 어느 파에 속하느냐가 서로 혼인하는데 잣대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 조선들은 서인이고 노론에 속하였다. 따라서 혼인도 그들끼리 하는 것이다. 굳이 역사를 살펴보지 않더라도 노론은 아주 완고한 성리학적 근본주의 윤리관에 선 파당이었다. 어릴 적에 딸이 공부하지 못하도록 억압한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여덟 살이었다던가, 물론 남녀 칠세 부동석이니 여덟살 먹은 딸이 외간 남자를 반기는 것은 금기였다. 하루는 용인에서 언니가 근친을 오셨다. 어머니는 멀리서 형부과 함께 집에 온 언니가 무척이나 반가웠던 모양이다. 얼른 마루로 나가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할머니의 눈에 얼음과 같은 냉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서 할머니가 아이의 옆구리를 꼬집으시는 게 아닌가. 영문도 모르고 방으로 쫓긴 딸에게 할머니는 아주 준엄한 꾸지람을 내리셨다는 것이다. “다 큰 계집아이가 외간 남자에게 인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무척 억울했던지 어머니는 중년에 이르기까지 두고두고 이  말씀을 하셨다.

어머니는 결혼하시고도 오랜 세월 아이를 갖지 못하였다. 15세에 시집와서 32세에 나를 낳으셨다. 불임을 극복하기 위하여 유명한 의사의 진료도 받고 절에 불공도 하셨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서대문에 절이 있었다. 뒤에 선바위라고 큰 바위가 있어 불공을 드리고 드디어 잉태하였다 하셨다. 병약한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봄에 내 동생이 생겼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을에 돌아가셨다.

젊은 과부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남편을 잃고 시댁에서 시부모와 시동생들은 늘 어려운 존재였다. 그러나 꿋꿋하게 우리 형제를 기르셨다.

머리는 얌전하게 쪽을 찌셨었다. 스스로 겸비한 외모를 하려고 비녀는 금도 아니고 은도 물론 아니었다. 흑각 비녀라고 까만 색, 무늬없는 단순한 것이었다. 그리고 늘 흰옷을 입으셨다.

우리 집은 겉은 부자였으나 속은 빚이 많았던 모양이다. 늘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선하다. 조선에도 점차 전운이 감돌고 물가는 급히 올라갔다. 인플레 시대에 들어갔다. 어느날 어머니는 허탈한 모습으로 지금은 성북초등학교가 된 성북동 별장이 정부에 수용 당했다고 하셨다. 별장이라고 하지만 크지 않은 집이 있고 뒤는 앵도밭이었다. 그러나 징발 보상금으로 지고있던 은행 빚을 갚고 얼만가 남았다고 하셨다. 겨우 열살도 안된 내게 이런 얘기를 하셨다.

어머니는 붓글씨가 아주 뛰어나셨다. 내 눈에는 이름을 날리던 서예가의 그것보다 더 아름다웠던 것 같다. 국민학교 5학년 때, 나는 졸업식에서 송사를 했다. 문안은 글솜씨가 좋았던 이희복 선생님이 쓰셨지만 두루마리 종이에 어머니가 붓글씨로 정서하셨다. 그리고 학교의 여러 선생님들로 부터 아주 놀라운 찬사를 받았던 게 생각난다. 그 필적이 많이 보존되지 못한 게 한이다.

요즘 말로 나는 ‘마마보이’였던가? 늘 어머니를 빼놓고 스스로를 생각할 수 없었다. 동생 면수는 어머니가 형만 편애한다고 불평하였다. 면수는 아버지쪽을 빼닮았고 나는 어머니쪽을 닮았었다. 자신을 닮았다고 그게 어머니가 나를 더 사랑한 이유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머니가 나는 멀리 미국에 유학을 떠나고 동생만 있을 때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의 임종을 동생이 혼자서 겪었던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오로지 회상에 불과하다. 어머니는 1904년, 갑진년 나셨으니까 지금 연세가 113 세가 되시는구나. 그 어머니가 그립다. 가정의 달, 5 월, 문득 어머니를 회상한다.


   이광수 (KG 51회)

  옮김  
   51회 이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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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오동순 17-05-12 04:34
 

창영밴드로 홈피를 등한하고 한동안 안보다가 들어와 이글을 읽고
마음에 갚은감동을 느낍니다.
차분히 어머님에대하여 쓰신 이광수 작가님, 옮겨주신 이성도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사무국에게도 감사드립니다.

그시대의 훌륭하신 여인상입니다.
이곳은 14일이 어머니 날입니다.
이글을 읽으면서 자축해봅니다.